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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5] 개혁의 본질
개혁의 본질
목적과 수단의 전도…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매우 뜨거웠던 198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에게 돈을 주는 게 옳은지를 놓고 대학생 선후배 사이에 입씨름이 붙었다. 선량한 크리스천이었던 1학년 학생이 갖고 있던 돈을 다 털어서 걸인에게 준 게 발단이었다.

열혈 운동권이었던 2학년 선배는 날선 목소리로 후배의 행동을 비판했다. “걸인에게 동전 몇 푼 쥐어주면 빈곤을 낳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네 싸구려 동정심 때문에 걸인이 굶주림을 면하게 되면 스스로 일어나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적선은 자기만족을 위한 위선이자 역사의 진보에 역행하는 행위다.”

후배는 선배의 생각에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지만 논리적으로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당연히 여기고 실천해왔을 뿐, 사회의 구조나 개혁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 있던 다른 후배들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들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선배의 주장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깨달았다. 민중을 위한 혁명이 성공하려면 더 많은 민중이 희생돼야 한다는 논리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궤변이었다. 구조적 모순이 심화돼야 체제 변혁이 일어난다는 이런 식의 유물론적 사회관은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 있었다.

개신교가 1대 종교로 부상했고 장·감·성·순·침이 함께하는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가 출범했다는 소식에 대한 일부의 부정적 반응들을 보면서 떠오른 이야기다.

2005년 이후 10년 동안 개신교 인구가 100만명 이상 늘었다는 뉴스는 예상을 빗나간 것이어서 충격이 컸다. 특히 일부 목회자의 일탈과 교회 분쟁,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범람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은 이번 통계의 가치와 신뢰성까지 부인하려 들었다. 예상에서 어긋났을 뿐 아니라 절실한 한국교회 개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깔려 있었다.

이들은 주요 교단 주도로 이뤄진 한교총 출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맥락은 비슷했다. 한국교회가 더 분열하고 더 추락해야 잘못을 깨닫고 근본적인 개혁을 할 수 있을 텐데, 한교총 출범이 이를 지체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개혁과 정화가 시급한 교계 정치권을 그대로 두로 연합에 합의한다는 것 자체가 미봉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대형교회 대형교단들은 더 많이 부패하고 더 많이 싸우고 목회자들은 더 큰 사고를 치고 개신교 인구는 500만명 아니 100만명 이하로 줄어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이야기다. 근본적 개혁을 위해서는 더 부패하고, 더 희생되고, 더 고통 받아야 한다는 얼치기 진보 논리,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정치공학과 다를 바 없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부패를 일소하려면 더 많이 부패돼야 하고 복음의 본질을 되찾기 위해서는 복음이 더 많이 훼파돼야 한다는 것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다. 이는 보수정권이 미우니 외환위기 같은 국가적 위기가 한 번 더 와야 한다거나 진보정권이 싫으니 6·25전쟁이 한 번 더 나야 한다는 극단적 사고와 궤를 같이한다. 이런 사고의 바탕에는 개혁에 수동적인 사람들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부재가 있다.

사익을 추구하는 소수의 이권집단이 공익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에 분노하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개혁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세상 속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개혁돼야 하는 것도 옳다. 하지만 개혁 자체를 위한 개혁, 분노 해소용 개혁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개혁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아도 사람들은 정의를 위해 일어서 행동한다는 사실도 신뢰해야 한다.

송세영 종교부장(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