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캐스터   
  [2011/12/13] 아내가 떠난 뒤
아내가 먼 길을 떠났다. 아직은 할 일이 많은데 나이 50을 막 넘기고 훌쩍 가버렸다. 2년 6개월 동안 혼신의 의지로 병마(病魔)와 싸운 수고도 헛되이 그렇게 갔다.

지독한 병이 든 것을 처음 알게된 뒤 했던 독백처럼 (두 아이를 포함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남자 셋'을 남겨두고 아내는 세상을 떴다. 신앙을 사명으로 물려주고, 평소에 버릇처럼 다짐했던 대로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을 따라 갔다. 생전엔 좋은 옷 한 벌 그토록 사입지 않더니 비싼 베옷 한 벌 사준 대로 입고서.

비록 힘들었지만 아내를 간호하며 보낸 날들은 행복했다. 결혼 이후, 그 전에 25년 동안 나눴던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대화하고 서로를 위로했다. 늘 같았는데도 늦은 오후만 되면 몇시에 집에 오느냐고, 지금은 어디를 오고 있느냐고 아내는 매일 휴대전화로 물었다. 집에도 사람이 있었지만 아픈 것 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고독 때문이었다.

이제 전화는 끊어졌다. 뭘 먹어라 뭘 입어라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챙겨주던 참견도 저절로 사라졌다.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것이라고 했다.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아 저녁이면 시드는 풀 같으며, 영화(榮華)는 풀의 꽃과 같다고도 했다.

연수(年數)의 자랑이 수고와 슬픔뿐임을 아무도 모르지않는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고 높은 것도 모두 안다.

살아있는 사람의 일이어서 그렇지 오래 사는 것과 조금 덜 살고 가는 것의 차이는 사실 무의미하다. 그런 줄은 알지만 죽어서 슬프지 않은 이별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그립다. 나아서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며 살아가겠다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것이 너무 비통하다.

집 안은 아내의 흔적이 온 데 배여있다. 어두웠던 삶의 찌꺼기들은 이미 희미해졌지만 죄가 될 것 같아서 하찮은 유품 하나도 함부로 치울 수가 없다. 아프지않을 때 좀 다정할 걸…. 쌓이는 것은 후회뿐이다. 그럴수록 아내의 빈자리는 커질 것이다.

20년전쯤 됐을까. 은퇴하면 둘이 살자며 경기도 용인에 작은 집 한 채 지을 땅을 샀다. 아내의 고단했던 육신은 그 옆동네 공원묘지의 양지바른 언덕에 깊이 잠들었다. 살아서 집 지어 살려던 계획은 사라졌지만 언젠가 둘이 함께 유숙(留宿)할 처소를 마련한 것에 감사한다.

비문(碑文)에는 이렇게 새겨질 것이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시편 121:5∼6)

태어나고 죽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 권역에 속한다. 아내에게는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똑같은 불행이 더는 없어야겠기에 한 가지는 짚어두고 싶다.

아내의 희생은 명성 높은 서울 도곡동 O유방전문클리닉에서 3년 6개월 전 시작됐다. 클리닉 원장은 인근 미즈메디병원에서 '극히 미세한 이상(異常)'을 포착한 필름을 보고난 뒤 별것 아니라고 판정해줬다. 그런 경우 적정시기의 관찰진료를 예고해주는 것이 기본인데 클리닉 원장은 그러지도 않았다. 아내는 그래서 그를 더 철저히 신뢰했다.

1년 뒤, 오른쪽 어깨 부위에 통증이 심해 그 클리닉을 찾아갔더니 유방암 3기말. 날벼락이었다. 원장도 덩달아 놀라며 '특이체질' 같다고 우물거렸다. 아내는 곧바로 한 쪽 가슴 절제수술을 받았고, 그로부터 1년 2개월 뒤 전이성 뇌종양 환자가 됐다.

한동안 아내는 "억울하다"고 말하곤 했다. 이별이 가까와져서는 "운이 없었다"고 푸념했다. 하필 그 클리닉을 찾아간 것에 대한 회한이었다. 그런 일로 생을 앞당겼거나 마감하는 사연은 널려 있을 것이다.

실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트려놓고도 변함없이 병원문을 열어놓고 돈벌이에 바쁜 의사와 의료풍토는 용서할 수 없다.

글 한석동(국민일보 논설실장) jerome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