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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1] 양심
근래에 ‘앤드류 포터’의 저서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 많은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임팩트와 점점 더 반대로 치닫고 있는 세태와 현실이 책을 집어 들게 한 동인이 됐던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진정성’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는다. 다만 진정성을 논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알아야 하고, 그것과 대조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것’ 물론 좋다! ‘그렇다면 무엇과 대조하여 진정성인가?’ 그는 이 질문을 가리키며, 다시 ‘진정성’이라는 말을 환기시킨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래도 사람의 생명이 결부된 사안에 있어서는 ‘이윤이나 여타의 논리’가 파고들 틈이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버젓이 기업의 이윤추구, 경제논리와 정치논리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 두렵게 한다. ‘가습기 살균제’ ‘방향제’ 등으로 촉발된 ‘비양심 몰염치’ 세태는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국가기관의 답변마저도 여론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무엇과 대조하여 진정성인가?’ 다시 앤드류 포터의 질문 앞에서 나는, 조심스레 ‘양심’이라는 단어를 꺼내본다. 흔히 양심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면 ‘공중도덕’부터 떠오르는 건 주로 그런 일들에서 이 단어가 강조되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양심’은 ‘욕심’과 한 문장 위에 놓이기도 한다. 둘은 사람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으며, 실체가 없다. 하지만 사람의 말과 행동, 삶과 태도 모든 방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 ‘양심’을 꺼내든다는 사실 자체가 ‘나이브’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페르소나, 곧 ‘가면’에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진실성, 진정성에 목말라 하면서도 현실을 앞세워 거짓을 합리화하고 위선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다시 ‘진실한 사람’을 찾아 헤매는 ‘사회적 갈증’이 이어진다.

양심이해는 두 방면에서 이루어진다. ‘직관주의’와 ‘경험주의’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인간의 타고난 직관이면서, 동시에 사회화 과정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체득되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쓰인 ‘양심’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사도행전 23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돼 사슬에 묶인 몸으로 공회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23:1) 이를 지켜보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한다.

그러자 바울이 아나니아를 향해 소리친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23:3) 나는 사도의 담대함을 주목한다. 물론 주님께서 주신 용기다. 하지만 그 원천은 바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범사에 양심을 따라 살았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 아닐까.

양심(conscience, the inner voice)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라고 했다. 희랍어로는 ‘수네이데시스(suneidesis)’로 그 뜻은 ‘함께 안다’이다. 풀어 본다면 ‘양심’의 본뜻은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안다’이다. 가톨릭교회는 양심을 ‘하나님의 목소리’라 가르친다. 마음속 깊은 법, 그러나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복종해야 할 거기에 있는 법. ‘사람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육체의 지성소’라고도 가르친다.

사도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해 공회 앞에서 말할 때, 그는 자신을 변호함과 동시에 모든 사람의 양심을 찔렀던 것이다. “나도 알고, 신도 아신다.” 양심이 보이지 않는 건, 보이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이미 그 차원을 떠나버리기 때문. 양심이라는 자기 거울에 비추어본 말과 행동일 때, 진정성이라는 생기도 얻어질 수 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양심은 영혼의 심장, 누구도 영혼을 가리거나, 속일 수는 없다.

손성호 목사 (서울 초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