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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21] 박형규, “삶이 아름다웠던 진짜 목사”
민주주의와 인권이 탄압받는 현장에 그가 있었다. 유신독재 반대운동의 맨 앞줄이었고, 빈민선교와 노동자선교의 문을 열었으며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의 고문과 6번의 투옥, 거듭된 생명의 위협, 교회를 빼앗기는 고난 속에서도 낙천적 자세와 농담을 잃지 않았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거목 박형규(1923∼2016) 목사를 향해 사람들은 “삶이 아름다웠던 진짜 목사”라고 회고했다.

박형규목사기념사업회는 지난 8월 17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박 목사 2주기 추모 문집 ‘박형규와 함께 그 길을 걷다’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원로들은 물론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과 손학규 이미경 이부영 이철 전 의원도 참석했다.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인 김상근 목사는 “사도행전이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 제자들의 삶을 전하는 기록이라면 이 책은 박 목사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속(續)사도행전”이라고 말했다.

유신정권에 반대하면 모조리 ‘빨갱이’로 몰던 시절, 한국교회는 민주화운동의 보루였다. 공산정권에 맞서 순교까지 하며 신앙을 지켜온 목사들을 빨갱이로 몰긴 어려웠고 미국 독일 등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교회들이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박 목사는 그가 섬기는 서울제일교회 신자들과 함께 1973년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계획했다는 이유로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됐다. 유신정권에 대한 조직적 반대 움직임이 나타난 신호탄이었다.

박 목사는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또 구속돼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으나 10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후 ‘자신이 끌어온 돈을 자신이 횡령했다’는 초유의 선교자금 횡령 혐의로 또다시 구속돼 10개월 복역 후 만기 출소했다. 이후에도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의 죄목으로 거듭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를 주관하다 6번째로 수감됐으나 한 달 만에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군사정권에 맞서 싸울 때보다 어려웠던 시절은 폭력배들에게 교회를 빼앗겼을 때다. 박 목사는 1981년 기장 교단의 제66회 총회장이 되고 이듬해 NCCK 인권위원장이 돼 전두환정권의 광주 학살을 해외에 알렸다. 이때부터 보안사의 예배방해 공작이 시작됐다. 폭력배들이 몰려와 박 목사와 교인들을 습격하고 당회장실에 감금한 뒤 살해 위협을 했다. 심지어 교회를 봉쇄해 출입 자체를 막았다.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 초연됐을 만큼 문화운동의 본거지였던 교회 대학부와 청계천 노동자들을 도운 형제의집 등을 와해하려는 의도였다.

박 목사는 이때부터 만 6년간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노상 예배를 보며 ‘길 위의 신앙’을 이어가다 민주화가 된 후 교회로 복귀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으로 일했다.

출판기념회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함께했다. 유 전 청장은 “박 목사님과는 (민청학련) 감방 동기”라고 말했다. 박 목사를 향해 “고난 속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아 연구 대상이었던 분”이라며 “너그러움과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신기했을 따름”이라고 밝혔다. 유 전 청장은 문집에서 “사방이 수많은 책으로 둘러싸인 목사님의 서울 화양동 자택 서재와 손때 묻은 영문 원서와 문학 작품들이 기억난다”며 “한국미술사를 공부하겠다는 나를 감옥에서도 응원해 주셨다”고 회고했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문집에 ‘고모부 박형규 목사님 이야기’를 썼다. 조 교수는 “독재시절 나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러 오실 때마다 누군가 모셔다 주곤 했는데 안기부 사람이었다”면서 “영화 ‘1987’을 보면서 그렇게 따라다닌 분들과도 친구처럼 지낸 고모부 생각을 많이 했다. 주변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고모부였기에 저는 특히 고모부를 좋아했다”고 전했다.

우성규 기자(국민일보 종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