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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08] 오규정, 국내 첫 ‘각막은행’ 세워
“나부터 소중한 걸 내놔야 이웃도 나눔에 동참”

지난 12월5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한 카페에서 박지훈 기자(국민일보 종교부)가 오규정(50) 목사를 만났다. 오모사의 과거는 파란만장했다. 전북 전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1990년 2월 전북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한 건설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건설사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한 카페에서 만난 오 목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건설 현장이 거칠잖아요. 술 마시고 담배도 피게 되더군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자연스럽게 욕설도 하더라고요. ‘이 길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입사 2년 만에 회사를 그만둔 그는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슈퍼마켓을 차렸고 우유대리점도 운영했다. 장사는 그럭저럭 됐지만 보람을 느낄 순 없었다. 이것 역시 그가 바랐던 삶이 아니었다.

“고 문익환 목사님을 존경했어요. 독재에 항거하며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문 목사님처럼 살고 싶었죠. 그런데 제 삶은 그렇지 못한 거예요. 매일 새벽이면 우유를 배달하고 가게를 운영하고…. 마치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살고 있더군요. 사는 게 재미가 없었어요.”

오 목사는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출석하던 전주중앙교회 김옥남 담임목사가 이런 제안을 해왔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직원을 추천해 달라는 제의가 왔는데 자네가 해보면 어떻겠나. 월급은 적지만 지금처럼 나태하게 사는 것보단 나을 걸세.”

오 목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지만 갑자기 대학시절 자신이 가슴에 품었던 꿈, 세상을 위해 일하고 싶던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국 그는 김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안을 받고 3개월쯤 지난 1998년 2월부터 그는 이 단체 전북지역본부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장기기증운동은 일반인들에겐 낯선 캠페인이었다. 오 목사는 자신부터 이 운동에 참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걸 먼저 내놓아야 남들을 설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무국장으로 취임하고 1년여가 흐른 이듬해 3월 자신의 왼쪽 신장을 기증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굉장히 떨리더군요. ‘마취에서 못 깨어나면 어쩌지’ ‘아픈 건 아닐까’…. 이런 걱정이 계속 들었어요. 하지만 수술 들어가기 직전 친구에게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성경 속 말씀이 생각나더군요. 그 말씀을 떠올리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오 목사는 2005년 1월 조혈모세포(골수)도 기증했다. 골수 추출 수술을 받을 땐 긴장을 안 했는지 묻자 “신장 기증 경험이 있어 골수 기증 땐 편한 마음으로 수술에 임했다”고 웃으며 답했다.

“저의 결정에 대해 가족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 ‘이제 간을 기증할 차례다. 간도 기증하겠다’고 말하면 다들 만류합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기증은 그만 하라고 하네요(웃음).”

오 목사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퇴사한 2005년 12월 정영택 전주 온누리안과 원장과 함께 온누리안(眼)은행을 설립했다. 안구를 기증받아 각막을 적출해 필요한 사람에게 각막을 제공하는 국내 첫 ‘각막은행’이었다. 현재까지 이곳을 통해 각막이식 기회를 얻은 수혜자는 400명이 넘는다.

오 목사는 2002년 늦은 나이에 목회자의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에 한신대 신대원에 입학했고 2007년 3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현재 그는 전북 정읍 신광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신장이 아픈 사람을 보셨다면 당신의 신장을 떼 주시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생명나눔운동에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을 나누는 일은 신앙인으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생명을나누는사람들: 1588-06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