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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7] 종교란 무엇인가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기원전 900년∼기원전 200년의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Age)’로 명명하였다. 이 시기 인류는 비약적인 정신의 발전을 경험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를 그는 인류 역사의 중심축으로 봐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기독교에 은혜의 시대, 다시 말해 사랑의 시대가 열린 시기를 포함해 다시 정의한다면 기원전 500년∼0년 사이 인류는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이 시기에 나타났던 사유의 수준을 인류는 한 번도 넘어선 적이 없다고 야스퍼스는 말한다. 나는 그에게 동의한다. 이번 주 일요일에도 전 세계의 인구 중 22억 명은 교회와 성당에 가서 축의 시대에 설파되었던 가르침에 자신을 비추어 회개하고, 눈물 흘리며 새로운 삶을 다짐했다. 16억 명의 이슬람교도는 모스크에 가서, 5억 명의 불교도는 절에 가서 축의 시대에 성립된 진리 앞에 무릎을 꿇고 삶의 의미를 얻어왔다.

도대체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전쟁과 기근, 대규모 살육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인간의 수명은 종종 타살로 마감되던 시대에, 사랑과 자비가 나타났던 것이다. 자신에게 닥칠 것 같은 불행과 재앙을 피하기 위한 제례에 골몰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나를 초월하여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랑으로 인간은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영원한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사유가 퍼져 갔다. 야만의 시대에 나타났던 이 말씀이야말로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가르침의 높이를 우러르는 마음만큼 오늘 우리가 종교를 바라보는 느낌은 처연하다. 기독교의 계파들은 교단의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싸움과 소송으로 시끄러운데, 개교회의 세습 소동에 가려 교단의 문제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 세습마저도 정당하니 밖의 사람들은 참견할 필요가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절반쯤은 된다. 불교도 평화롭지 못하다. 종파의 이름 뒤에는 항상 ‘분쟁’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르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되어 버렸다. 전국의 큰 산을 오를 때마다 아무 데나 줄을 쳐놓고 중생들에게 입장료를 받는 초소 앞에서 종교의 본질을 되묻게 된다. 종교란 무엇인가? 3000원밖에 하지 않는 입장료(사찰마다 다름)지만, 그것을 보노라면 2000년 불교의 찬란한 가르침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궁금증이 사라지게 된다.

무신자들과 청년 세대들이 종교에 관심을 잃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 이것이 사탄이나 마구니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교회와 절이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종교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상식의 소리들을 인본주의로 몰아 대적하는 한, 종교는 인문학에도 패배하는 일이 지속될 것이다. 축의 시대에 펼쳐진 가르침을 경외하는 종교 밖의 사람들에겐 간디가 퇴각하는 영국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의 예수는 두고 가고, 교회는 가져가라’고 했던 말이 공감을 얻게 된다.

희망은 있다. 전국의 공동체를 탐방하러 다니며 놀라운 사실을 나는 발견한 적이 있다. 방방곡곡의 죽어가는 마을이나 고장을 일으켜 세운 곳을 찾아가 주인공을 만나보면 어김없이 그는 장로이거나 사부대중의 보살이었다. 마을 하나, 공동체 하나를 살리는 데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자처하고 썩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기독교와 불교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차지했던 의미를 눈으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내년이 3·1운동 100주년이라 하는데, 실은 그 운동의 바탕에도 기독교와 불교의 힘이 없었으면 힘든 일이었다. 안중근 의거도 내년 110주년을 맞는데, 안 의사의 의거와 평화사상 역시 가톨릭 신앙을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토대는 결국 종교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12월, 한 해를 돌아보며 다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새해에는 교회와 절 때문에 우리 사회가 희망을 품고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신의 현존은 타인과의 관계에 있다고 고백하며,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모습은 늘 거룩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종수(연세대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