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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1] 오정호, 말에 품격이 있는 성도인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당나라 시대 관원을 등용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었다. 즉 한 사람의 풍채와 용모, 언변, 글씨, 판단력을 의미한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공무원의 됨됨이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얼마나 더욱 고상해야 할까. 필자는 목회자로서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정기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며 수많은 사람과 사적인 대화를 나눈다. 이런 처지이기에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 자신의 말의 행로를 주목하게 된다.

목회자의 정제되지 않은 말은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동시에 말 때문에 격려를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수많은 회의에 참석해 보니 그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말 때문에 회의가 목적을 잃어버리고 난장판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옛 성현은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라는 표현으로 말의 유용함과 아울러 말의 허망함을 지적했다.

말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선명하다. 그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단정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주님께서는 말을 인격의 열매로 간주하셨다. 말이 곧 인격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보여 주는 그리스도인의 신분 변화는 필연적으로 언어생활의 변화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이방문화의 중심인 에베소의 성도들을 향해 신분에 걸맞은 차원 높은 언어생활을 당부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3∼4)

그렇다면 성도의 격에 맞는 언어생활의 조건은 무엇일까. 첫째, 살리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말이란 기묘한 것이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손에 몽둥이를 들지 않고서도 말 한마디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공무집행 중인 경찰의 말 한마디는 수많은 범죄자를 얼어붙게 만든다. 부모 교사 목회자는 살리는 말의 전공자다.

초등학교 교장인 ‘엄마 반성문’의 저자 이유남 권사는 전교 1등을 하던 아들과 딸이 고3과 고2 때 자퇴를 선언한 이후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는 가운데 스스로 자녀들의 어머니가 아니라 감시자의 역할을 해 왔음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입만 열었다 하면 “얼른! 빨리! 바빠!”를 달고 살았다고 고백했다. ‘감시자의 언어’로는 아이들을 세워주지 못했지만 ‘인정, 존중, 지지, 칭찬의 말’로써 아이들을 살려내게 됐다고 자신을 성찰했다. 복음 자체가 살리는 말이다. 성도는 살리는 말의 달인이 돼야 한다.

둘째, 정직한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말은 문화의 반영이다. 따라서 말 속에는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거짓의 문화는 거짓된 언어를 쏟아낸다. 실체적 진실 곧 팩트(fact)에 바탕을 둔 말이야말로 모든 소통의 기초를 이룬다. 사기꾼이 비열한 것은 신뢰를 가져가고 거짓을 뿌리기 때문이다.

셋째, 때에 맞는 말이다. 때에 맞는 말은 상대 존중의 마음이 작동될 때 가능하다. 다양한 환경과 목적 가운데 이루어지는 생산적인 말의 적시안타는 모두의 기쁨으로 환원된다.

넷째, 감사의 말이다.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말은 허락하신 은혜에 대한 각성이며,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말은 생산적 관계의 마중물이 된다. 주님께 감사로 올려질 때 그것을 찬양이라 한다. 구시화문(口是禍門), 곧 입이 화를 불러오는 문이라고 하는 생각에서 진일보해 구시복문(口是福門), 곧 입이 만복을 불러오는 문이라고 하는 확신이야말로 뭇 성도들에게 예외 없이 요구되는 말의 품격인 것이다.

솔로몬의 입의 철학을 가슴에 새겨보자.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 13:2∼3)

봄의 완연함으로 이웃과 만남이 빈번해지는 때에, 관계를 세우는 언어의 축복을 누리기를 소원한다.

오정호목사(새로남교회)